인문학, 먹고사는 공부가 아닌 살아가는 공부
앞서 전문성이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삶에 필요한 교양을 쌓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공부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당장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다. 있는 사람이 부럽지만, 없어도 생계를 이어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AI에게 대체될 걱정도 없다. AI는 인간과 교양을 겨루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AI를 올바르게 학습시키고 활용해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예술을 즐기며 교양을 쌓는 일은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쉽게 와닿지 않는다. 돈이 많거나 여유 있는 사람들의 지적 유희쯤으로 생각한다. ‘내가 지금 그런 거 할 때야가?’라며 삶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뤄 둔다. 그러다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삶의 후반부에 이르러도 우선순위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배운 적이 없고 습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미를 알지 못하고 의미를 느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전문성을 쌓기 위해 애쓰는 것만큼이나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의미 있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생존만이 목표인 사람은 없다. 누구나 인간답게 살고 싶어한다. 직업을 갖고 돈을 번다고 해서 저절로 인간다운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이 가치 있다고 느끼는 생각의 힘이 필요하다. 그건 단순히 열심히 산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삶을 이해하는 인문학적 소양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종교를 갖고 신앙을 갖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인문학과 예술을 배우고 교양을 쌓는 이유는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다. 돈을 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한때는 인문학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면 지식이 융합되고, 남과 다른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어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인문학을 공부한 이유도 그곳에 있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도 비슷했다.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었고, 인문학적 상상력을 기술과 접목해야 한다는 말이 유행했다. 호텔에서는 사업가들의 조찬 모임이 이어졌고, 저녁마다 인문학 강연이 열렸다. 통섭, 융합, 협업이라는 말이 시대의 키워드가 되었고, 예전처럼 한 가지만 잘해서는 안 되는 시대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책을 읽고, 저녁마다 인문학 강연을 찾아다녔다. 사업가 조찬 모임에 참여해 아침 일찍 호텔에서 강연을 들었고, 각종 세미나와 포럼을 다니며 명함을 돌렸다. 하지만 그 목적은 의미 있는 삶이 아니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 얻어 사업을 성공시키고 싶은 욕심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역시 대부분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교양을 쌓고 지적 수준을 높이는 일은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한 과정이었다. 전문성을 쌓기 위해 공부하고 일하는 것과는 애초부터 목적이 달랐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둘 모두가 필요했다.

인문학은 개인의 삶뿐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업을 갖고 맡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더 넓고 깊게 사유하고, 서로 공감하며, 함께 연대해야 지속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며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전문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의 교양 수준에 달려 있다. 좋은 사회는 좋은 시민이 만든다. 민주주의 역시 시민의 수준만큼 성숙한다. 정치인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수준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과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 공동체를 생각하는 태도가 결국 한 사회의 품격을 결정한다.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대체하고 경제 전반에 깊숙이 스며드는 미래에는 이러한 교양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사회도 함께 성숙해야 한다. 시민들의 지적 수준과 교양이 그 사회의 수준을 좌우한다.
흔히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를 가보면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철학적 깊이와 시민들의 성숙도,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이것은 성장의 과실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같은 기술과 같은 경제 수준을 갖고 있어도 시민들의 의식 수준에 따라 사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한다.
최근 여러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이제는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이라는 이름이 낯설거나 가볍게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경제와 문화의 성장에 걸맞은 철학적 깊이와 시민의식까지 갖추었는지는 여전히 고민해야 할 문제다. 지금의 위상에 걸맞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경제 수준에 걸맞은 의식 수준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젊을 때일수록 더욱 그렇다. 교양은 나이가 들고 여유가 생긴다고 저절로 쌓이지 않는다. 미리 배우고, 생각하고, 익혀야 한다. 그래야 사람의 깊이가 생기고, 삶의 격도 함께 높아진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알겠지만 아빠는 지금도 일요일 아침마다 북클럽에 참여해 다양한 사람들과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집에 꽂혀 있는 책들도 전공서적보다 다른 분야의 책이 훨씬 많다. 지금까지 충분히 설명했으니, 변호사가 법만 알면 되지 왜 저런 데까지 관심 갖느냐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먹고살기 위해 애쓰고, 가족을 부양하며,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답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AI와 기술 발전으로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에는 어쩌면 후자가 더욱 중요한 가치가 될지도 모른다.
너도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할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소설과 역사, 철학과 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를 배우고 익혔으면 좋겠다. 그것이 삶의 지혜를 갖춘 어른으로 성장하는 비결이다. 그런 어른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도 함께 성숙한다. 전문성은 너를 먹여 살릴 것이지만, 인문학은 네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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